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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 기사

원문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www.newscham.net/news/trackback.php?board=news&id=43246


촛불집회 귀퉁이에 앉아 있는 운동권, 당신에게

[완군의 토마토 던지기] 2008년 5월 26일 서울, ‘알 수 없는 인생이라 더욱 아름다운 것’

완군 (공공미디어연구소)  / 2008년05월27일 14시43분

확실히, 집회는 변해 있었습니다. 간만에 찾아온 ‘역동(逆動, 거슬러 움직임)’이었습니다. 집회가 역동이었다는 것은 운동이 ‘역능(力能)’을 회복하고 있다는 뜻일 겁니다. 선정적인 호들갑의 난무도 경계해야겠지만, 사태를 여기까지 끌고 온 ‘소녀’들을 인정하지 않을 방법도 없습니다. ‘스쳐가던 얘기뿐이던 집회’를 당연시했던 저는 더 이상 그/녀들을 ‘어리다고 놀리지’ 않을 작정입니다.

어떻게 상황이 여기까지 왔는가, 배후를 궁금히 여기는 조중동 만큼이나 당신도 사태를 분석해내고 싶어 한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정말 궁금합니다. '시사IN'과 '오마이뉴스'는 현재의 상황을 세대론으로 갈음하며 10대들이 이명박에게 빚진 것이 없다고 하지만 썩 내키지는 않습니다. 어떤 평론가는 ‘제도 정치를 종언하고 삶 정치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오히려 진부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아직은 좀 더 지켜봐야겠고, 그렇게 ‘알 수 없는 인생이라 더욱 아름다운 것’ 아니겠습니까.

한 번도 투쟁해보지 않은 것처럼 투쟁하고 있는 학생, 직장인, 주부들 사이에서 당신의 모습은 오히려 조금 부자연스러워 보였습니다. 수십 수백의 집회에 참여했던 당신, 재작년부터 미국 소는 물론 한미FTA 자체를 저지하기 위해 무던히도 길을 뛰어다녔을 당신, 신자유주의 반대를 외치며 바닥에 앉아있는 것에 이골이 났을 당신인데 말입니다. 조중동이 말하는 배후(背後)설의 의미가 신체적인 등의 뒤를 말하는 것이라면 아마도 당신이 배후일 듯도 싶습니다. 당신은 시민의 등 뒤에 서 있었습니다.

물론,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배를 앞으로 드밀어야 할 텐데 자꾸 망설여졌습니다. ‘국익’에 반하는 쇠고기 수입 반대한다는 구호에도 완결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웠고, 태극기를 휘감고 있는 학생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게 영 마땅치 않았습니다. 애국시민 여러분 함께 해달라는 외침에는 왠지 창피하기까지 했습니다. 맞습니다. 당신과 똑같이 저도 그날 대오 주변을 배회하고 귀퉁이에 앉아있고 잘 섞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굉장히 신났습니다. 5천 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 시작한 행진이 을지로, 명동을 지나 종로에 도착했을 땐 1만 명이 넘게 불어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시민들은 손을 흔들었고, 멈춰 있는 차량들도 예전처럼 사납지는 않았습니다. 오랜만에 고립되지 않는 오히려 구심력을 갖는 행진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들은 누구일까요? 일단, ‘I LOVE MB'를 외치는 이들은 아닐 겁니다. 최소한 먹거리에 대한 각성과 주권에 대한 자존을 갖고 있는 이들일 겁니다. 어쩌면 사회 변화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분명, 그들은 지금은 팍팍하지만 언젠가는 자신도 돈보다는 생명이 존중되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을 긍정하며 퇴근하는 이들일 겁니다.

그들을 애국시민이라고 부르던, 개혁 지지자들이라고 호명하던, 무더기 대중이라고 칭하던 상관없습니다. 운동은 거기서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과 우리를 구별짓기 시작한다면 우리에겐 운동할 방법도 대상도 없어집니다. ‘계급과 투쟁의 사회학’을 조금 더 아는 ‘척’으로 우리 스스로를 구별하려고 한다면 운동권은 끝내 종속변수 이상의 사회적 의미를 획득하지 못할 겁니다.

▲  그들을 애국시민이라고 부르던, 개혁 지지자들이라고 호명하던, 무더기 대중이라고 칭하던 상관없습니다. 운동은 거기서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과 우리를 구별짓기 시작한다면 우리에겐 운동할 방법도 대상도 없어집니다. /사진-참세상 자료사진
어쩌면 오늘의 상황이 모두 낭만이 되고, “그리움 남기고 그 소녀 데려간 세월이 미워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당신 마음속에는 이미 ‘너무 당연한 것 아냐’ 하는 합리적인 당연시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난 10년간 ‘개혁’과 ‘애국’이 의미했던 정치적 지향에 대한 환멸이 당신의 당연시를 더욱 의심하기 어렵게 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최근의 상황과 집회들을 유리하게 활용하려 몸부림치는 분탕질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냥 ‘경계’하고 일단은 그냥 예의주시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그 시민들의 투쟁에 기꺼이 시민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흔치 않은 정치적 체험이고, 사회적 경험입니다. 언제까지나 운동권만의 무의식적인 습관, 정치적 선호, 문화적 생활양식을 고수하며 시민들의 저항을 구별하려든다면 운동은 끝내 보편화되지 못할 겁니다. 이는 결국 당신의 주변에는 마음씨 좋은 선배의 감언이설에 속아 운동인 줄도 모르고 시작했다가 발을 빼야하는데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는 자조를 농담으로 하는 친구밖에 남지 않게 됨을 의미합니다.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반란이라고까지 칭해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 ‘좌빨’이라는 힐난이 여전히 ‘꼴통’이라는 경멸과 비등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당신의 대답은 여전히 ‘그들은 계급성이 없다’입니까? 오늘도 상황은 흐릅니다. 당신은 무엇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어제처럼 집회 대오 귀퉁이 보도블록에 앉아 있을 수도 있고, 세미나에 참여할 수도 있고, 동료와 시국을 논하며 술을 마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역동(力動, 힘차고 활발하게 움직임)’적 움직임을 기획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by else | 2008/06/05 01:28 | 트랙백(80) | 덧글(0)

김호기, 전국민 좌절 금지 촛불

대단히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기보다는, 첫 문단이 인상깊어서 퍼왔다.

링크는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91461.html

발랄 당당 ‘전국민 좌절 금지’ 촛불
[촛불 현장 연쇄기고]③-김호기
신-구세대·온-오프 공존, 축제로 참여로 소통으로
‘사회운동의 진화’에 정치권 낡은 공권력으로 대응
한겨레
» 김호기 연세대 교수가 지난 1일 밤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서울 광화문 일대를 행진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사회운동은 나와 같은 정치사회학 전공자에게는 매우 중요한 연구 현장이다. 이 현장은 몇 가지 고유한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사회운동은 고정돼 있지 않고 살아 있다. 둘째, 운동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부와 외부의 이중적 시각이 필요하다. 셋째, 관찰과 참여의 거리가 언제나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1일 일요일 저녁 두 번째로 촛불집회에 가보았다. 첫 번째는 5월9일 촛불집회였다. 그 전날 <한국방송> 제1라디오 ‘열린토론’ 10대들의 촛불집회 참여에 관한 토론에 나갔던 터라 직접 현장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언론이 보도한대로 촛불집회에는 10대들이 상당히 참여하고 있었다. 발언은 발랄했고 표정도 당당했다. 내가 발견한 것은 이들은 ‘386 세대’와도, ‘88만원 세대’와도 다르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이들에게 쌍방향 소통의 ‘2.0 세대’라고 이름붙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3주가 지난 일요일 현장에는 새로운 참여자들이 크게 눈에 띠었다. 대학생, 직장인, 예비군, 유모차에 아기를 태운 주부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이 가득 메운 광화문 사거리는 거대한 아고라(광장)를 이뤘다.

사회학자 하버마스가 말했듯이 시민사회는 본디 자유로운 무정형의 공간이다. 이순신 동상 부근에는 시민들이 경찰과 팽팽히 대치하고 있었지만, 후방에선 ‘거리의 축제’, ‘거리의 민주주의’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고시 무효와 재협상’을 외치고, 어떤 이들은 정답게 손잡고 현장을 가로질러 가고, 또 다른 이들은 돗자리를 깔고 김밥을 나눠먹으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2008년 봄 광화문 사거리에는 ‘현대’와 ‘탈현대’가 함께 있었다. 한켠에선 사회운동조직에서 온 이들이 80년대 엄숙한 운동가요를 부르고 있었다. 다른 쪽에선 10대들이 연신 문자메시지로 집회를 생중계하고 있었다. 일찍이 나는 우리 사회에서 ‘모던’과 ‘포스트모던’이 이렇게 활기차게 공존해 강렬한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것을 보지 못했다.

관찰자의 시선에서 광화문 사거리는 직접행동의 생생한 현장이다. 제도의 정치가 국민 다수의 뜻을 거스를 때, ‘제도의 민주주의’가 무기력할 때, 시민들은 자신의 마지막 수단인 직접행동, ‘거리의 민주주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피켓을 들어 오만한 권력을 비판하고, 대한민국의 주인은 바로 우리 자신임을 증거하고, 바로 그 속에서 연대와 참여라는 소중한 민주주의 가치를 스스로 체득하고 있었다.

내가 발견한 것은 진화하는 사회운동이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가 소멸하고, 중심이 없는, 아니 모든 이들이 스스로 중심이 되는 이 ‘거리의 정치’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그 때 녹색교통운동 민만기 사무처장을 만났다. 그 역시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다(多)중심화되고 내부와 외부의 장벽이 무너지는 이 새로운 ‘거리의 시민불복종’은 우리 시민사회의 새로운 문턱, 새로운 진화를 상징한다. 엄숙에서 발랄로, 의례에서 축제로, 지도에서 참여로, 위계에서 네트워크로, 단절에서 소통으로 우리 시민사회는 이제 새로운 진화의 문턱 위에 서 있었다.

문제는 정치다. 시민사회는 이렇게 디지털로 끝없이 변신하고 있는데 정작 정치는 여전히 낡은 아날로그, 그것도 정당성 없는 공권력으로 완고하게 대응하고 있으니, 이 시간의 격차를 대체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밤 10시 30분, 광화문 사거리에서 서울 역사박물관까지 걸어와 집으로 오는 택시를 탔다. 머리 속에는 오래 전 부르던 “살아서 만나리라”는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의 한 구절과 방금 전 들었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 제1조>의 한 구절이 뒤엉켜 맴돌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MC 몽 노래의 한 구절이 순간 내 귀에 걸렸다.

“찬 바람 불 때 내게 와 줄래 …신나게 놀자 웃자 한바탕 …전국민 좌절 금지 프로젝트.” 그렇다. 촛불집회는 전국민 좌절 금지 프로젝트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희망의 속삭임일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는 참여자가 돼 있었다.

연세대 교수·사회학


by else | 2008/06/05 01:25 | 트랙백(92) | 덧글(0)

리퍼러 순위

다들 아는 사실이겠지만, 이글루스의 관리 메뉴에 통계가 있다. 이게 어떤 체계인지 나는 아직 잘 모른다. 여하튼 리퍼러 순위란 걸 보다가 신기한 검색어를 찾았다. 바로 오늘 구글 검색을 통해 이 이글루로 들어온 검색어인데, 다음과 같다.

1. 외계인 그들은 "듣겠습니다"
2. 외계인 그들은 기뻐하지도



................................................ 그래서, 뭘 찾고 싶었던 거? ;;

여튼 이게 <유배행성>에 걸렸다. 이거 말고 양갈래, 양갈래머리 등도 걸렸다. 뭔가 재미있다.

by else | 2008/04/27 23:47 | murmuring | 트랙백(62) | 덧글(0)

<천국의 가장자리>, 혹은 <다른 한 편에서 Auf der anderen Seite>


조금 앞서가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면, 그/녀가 뒤를 돌아본다. 뭘 그리 빨리 가느냐고 웃고 책하며, 발걸음을 나란히 한다. 혹은 아마도 낮고 노란 등이 정겨운 술집, 그/녀가 바로 한치 옆 자리에나 앞 자리에 앉아 있다. 실없는 우스개 소리가 흥겨워 등을 툭툭 쳐본다. 일상의 풍경이다. 그러나 손이 닿을 수 있는 이 거리, 이 거리없는 거리란 것이, 얼마나 가슴저리도록 소중한 것인지를, 우리는 일상에서 얼마나 자각하며 살아가는걸까.

너와 나 사이, 관계는 거리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관계의 본질이며, 언제나 계속되는 상태이기도 하다. 영화 <천국의 가장자리>는  관계의 거리들을 우리 눈 앞에 펼쳐놓는다. 세상의 관계가 태생적으로 품고 있으며, 그리하여 언제나 다시금, 관계 안에 있는 이들의 가슴을 찢어놓는 거리들을. 

*

영화 <천국의 가장자리>는 세 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예테르의 죽음, 로테의 죽음, 그리고 다른 한 편에서가 그것이다.

최초의 거리는 관계를 시작할 때의 거리이다. 서로 다른 존재 사이에 놓여져 있는 멀고 먼 거리가, 삶의 힘겨움을 매개로 쉬이 다리놓아진다. 우연적이라 하더라도, 모든 관계의 시작은 기적이다. 늙은 터키 이민자 알리는 같은 터키 이민자이며 독일에서 성매매를 하는 예테르를 만나 같이 살기를 제안한다. 성매매를 한다는 이유로, 다른 터키인들에게 계속 위협을 받던 예테르는, 자기와 살며 자기와만 자자는 알리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같은 시간, 예테르의 딸 아이텐은 반정부 운동을 하다가 쫓겨나 독일로 도망치지만, 기질 강한 성격 때문에 독일 피난처에서도 쫓겨나 노숙을 하고 있다. 그러다 학생 식당에서 우연히 로테를 만나, 그녀의 집에 머물게 되고, 사랑에 빠진다. 커다랗고 강한 눈을 가진 아이텐과, 강아지처럼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가진 로테의 사랑은 그렇게 펼쳐져간다.




그리고 대개의 설화와 민담이 그러하듯, 관계에는 전형적인 방해자가 있다. 예테르와 알리의 아들 네자트의 관계는 아버지 알리의 질투로 방해받고 있다. 로테 역시 어머니의 반대에 부딪힌다. 68세대이자 기성 세대인 로테의 어머니는, 유럽 연합의 기치를 이데올로기로 하는 보수주의와 가슴 속에 묻어 둔 자유로움을 함께 가진, 방해자이며 조력자. (그녀는 유럽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꾸려 하는 아이텐을 책하고 무시하면서도, 실질적으로 그녀의 망명을 돕기 위해 변호사 선임 등을 도맡는다.)

무엇보다도, 터키와 독일, 국제 이민과 국내 정치사회 문제들을 소재로 하는 이 영화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거리들이 관계 위에 가로놓이기 시작한다. 아이텐의 망명 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본국에 돌아가면 수감 생활을 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녀는 터키로 추방당하고, 수용소에 머무르게 된다. 이 거리, 견딜 수 없다. 로테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녀를 찾아 떠난다. 그 외에도 수많은 거리들이 있다. 성매매가 아니라 구두 장사를 한다는 예테르의 거짓말은, 그녀의 딸이 그녀를 찾을 수 없게 한다. 터키계 독일인 네자트는 혁명을 반대하는 괴테의 이야기를 가르친다, 그의 아버지가 떠나온 땅 터키에서는 반정부 혁명을 위해 젊은이들이 목숨을 걸고 있음에도. 한편 터키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주인은, 독일이 그립다. 고향이 그리워서 돌아가고 싶다며 더듬거린다. 자본주의 세계화와 그와 결부된 이민노동, 성매매, 성폭력, 독재 체제와 반정부 운동, 추방과 망명, 그렇게 펼쳐지는 유랑의 시대 - 삶은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거리들로 가득 차 있고, 그 거리에 의해, 자기 자신도 관계들도, 가로로 세로로 찢겨나간다.

그리고 이 모든 거리들 위로, 결국에는,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라는 가장 큰 거리가 무거이 가로놓인다. '다른 한 편'에 있는 이들의 가슴이 찢겨져나간다 해도, 극복할 수 없다. 로테의 죽음을 들은 어머니가 터키 호텔 방에서 홀로 우는 장면은, 가슴이 찢겨나간다는 말 외에는 다른 묘사를 찾을 수 없다. 삶의 길고 고단한 행로의 끝 즈음에서, 딸의 죽음을 마주하는 어머니. '남겨진 자의 슬픔.'


그렇게 <천국의 가장자리>는 국가와 사회라는 큰 이름들 안에서, 단지 '희생양'일 수밖에 없는 무용하고 무의미한 죽음들을 소재로 하고 있다. (괴테와 관련된 강의도 한 번 나오는데, <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의 희생양이 된 여성의 이름 또한 '로테'이듯.) 그렇게 이 영화는 국가와 사회의 문제가 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만드는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어떤 슬픔을 가져오는지를 낱낱이 펼쳐놓는다. 그 '희생양'은 다시금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에게 바쳐지는 것이기도 하다, 국가와 사회의 문제를 아는 것만이 아니라 느끼게 하기 위해서. 그것들이 얼마나 많은 삶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영화의 주 형식은 반복이다. 영화의 첫 머리는 끝 즈음에서 반복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네자트 혼자 해변에 앉아 있다. 마치 영원일 것처럼, 파도가 일렁이는 가운데, 오랫동안 앉아 있다. 그의 앞에는 대양이라는, 눈에 보이는 거리 중 가장 먼 거리가 펼쳐져 있을 뿐이다 -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는 그보다 얼마나 더 먼가. 네자트는 그저 무력하게 앉아 있다. 그렇게 우리 역시, 우리 앞에 가로놓여지는 거리들 앞에서는, 무력하게 앉아 있을 뿐이다. 관계의 거리, 세상이 가로놓는 거리, 삶과 죽음이 가로놓는 거리 앞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힘 없는 한 사람일 뿐인 우리는, 삶의 많은 순간에 그렇게 그저 앉아 있을 뿐이다.

*

하지만 로테의 죽음 이후, 로테의 어머니는 아이텐을 만나고, 또 네자트를 만난다. 거리로 의해 깊게 베어진 상처를 안고, 피흘리는 그들이 서로를 만난다. 관계가 상처를 주었지만, 그 상처를 매만져 거둘 수 있는 곳도 다시금 관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에 남겨진 사람들은, 함께 울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머물며 살아남아 간다. 이렇게도 모순으로 가득 찬, 관계라는 것.

관계는 거리로 가득 차 있지만, 삶은 거리를 가지고 있는 관계로 다시금 가득 차 있다. 우리는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그로부터 삶의 슬픔과 기쁨을 배운다. '다른 한 편'에 머물도록 허용된 이 한정된 시간 동안에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맘껏 슬퍼하고 맘껏 기뻐하도록 하자. 이 슬픔과 기쁨에서 구원되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의 시간, 삶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한정된 시간 동안에는.

by else | 2008/04/27 22:22 | 트랙백(67) | 덧글(0)

애니 <엠마>

요새는 <엠마>를 한두 편씩 본다. 모두가 '형식'을 지키는 사회는 평온하다. 이 '형식'이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어졌고, 지금 어떤 문제를 가져오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형식'이라는 건 그들이 지키는 작은 에티켓, 습관, 행동거지까지도 모두 포함하는 말이지만, 동시에 그 모두가 이데올로기임을 묻어버리는 말이다. 그러니 오늘만 쓰련다. <엠마>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좀 더 나중으로 미루고.

by else | 2008/04/26 01:57 | 트랙백(114)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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